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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 가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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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남성의전화
댓글 0건 조회 6,095회 작성일 04-04-09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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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엄마 돌아와요’-

다섯살 은지. 아직도 긴팔 스웨터를 입고 있다. 갑작스런 더위에 땀을 흘리면서도 아기곰이 그려진 그 스웨터를 벗으려하지 않는다. 엄마가 생일날 사준 옷. 어린 마음에 그 옷을 입고 있어야 엄마가 어디에서나 자기를 알아볼 수 있을 것같아서이다. 은지의 마음은 그 겨울 스웨터처럼 꽁꽁 얼어있다.

경기도 구리에 살던 은지는 2개월전 친할머니가 사는 서울 은평구 역촌동으로 옮겼다. 은지 아빠는 지난해 직장을 잃은데다 올해초 아내마저 가출하자 딸을 어머니에게 맡기고 아내를 찾아 나섰다.

『아범이 돈을 못버니 자기라도 벌겠다며 며느리가 식당을 차렸어요. 여기저기 빚을 내서 문을 열었는데 장사는 안되고 빚은 늘어나니 매일 전쟁이었지 뭐. 그러더니 그냥 혼자 도망가버렸어』

은지는 밤마다 『엄마가 보고 싶다』며 울고 잠꼬대까지 한다. 하루종일 징징대는 손녀, 어디서 뭘하는지 모르는 아들·며느리 걱정하느라 오래전부터 앓던 퇴행성 관절염이 도졌다. 그러나 그까짓 관절염, 억장이 무너지는 것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그래도 친할머니와 함께 사는 은지는 「행복」하다. 최근 고아원이나 아동임시보호소에 맡겨지는 아이들이 급증하고 있다. 지난해만 6,734명이 보호시설에 들어왔고 올해는 영아원 등에 아이를 맡기고싶다는 상담전화가 2배에 이른다.

멀쩡하게 부모가 살아있지만 돌봐줄 어른이 없는 고아 아닌 고아들. 어느날 아침 일어나보니 엄마가 없어져 들어온 아이들이다. 엄마는 혼자서도 아이들을 돌볼 수 있지만 혼자된 아버지들은 양육에 대한 부담과 직장때문에 아이들을 기관에 맡기려 한다. 가족이 뿔뿔이 흩어져 가정도 산산조각.

「가출」은 이제 청소년만이 하는 것이 아니다. 엄마들이 집을 나간다. 주부 가출은 곧 가정파괴를 뜻한다. 경찰청 백서에 따르면 96년 한해동안 2만7천9백6명의 여성이 가출했고, 이 가운데 주부는 1만5천명 정도. 그러나 신고되지 않은 이들을 합하면 지난 한해만 10만명이 넘는 주부들이 가출했으며 올들어서는 더욱 늘어나고 있다.

「아버지의 전화」 「남성의 전화」 등에는 아내의 가출때문에 고민하는 남성들의 상담전화가 하루에도 수십통씩 걸려온다. 예전에는 주부 가출의 주 원인이 남편의 폭력이나 외도, 고부갈등이었다. 그러나 요즘은 경제적인 이유가 크다. 경제적으로 무능한 남편을 못참거나 자신의 빚때문에 도망가는 30대 여성이 대부분이다.

「아버지의 전화」 정송대표는 『IMF가 화약고처럼 문제많은 가정에 불을 붙인 성냥 역할을 했다』고 말한다. 평소 건강한 가정은 이 위기가 더욱 사랑의 끈을 조여주는 역할을 하지만 사랑의 뿌리가 없이 위태롭던 가정들은 견디지 못하고 붕괴된다는 것이다.

실직·부도 등으로 남편이 경제력을 잃자 아내들이 생활전선에 나선다. 부부의 경제권이 바뀌면 갈등이 생긴다. 돈버는 아내에 대한 열등감때문에 순한 남편도 폭력적이 되기도 한다. 많은 주부들은 창업에 실패했거나 빚을 졌을 때 스스로 해결하지 못한다. 채권자들에게 시달리고 가족에게 미안함을 느끼느니 혼자 훌쩍 떠난다. 돈벌고 싶다는 욕심뿐 세상살이의 쓴맛이나 경제원리, 부채처리에 익숙하지 않은 주부들은 숨는 것으로 현실도피를 한다.

또 젊은 여성들에게 전통적인 가정상, 모성애가 부족한 것도 쉽게 집을 떠나는 원인이다. 요즘 여성들은 남편이나 자식때문에 자신의 인생까지 망치고싶지 않다는 이기적인 이들이 많다. 남편보다 능력있어 보이는 남자를 만나면 가정을 버리고, 또 유흥가에서 일하더라도 돈만 벌면 그만이라는 생각에 자신이 낳은 어린아이까지도 팽개치고 만다.

어떤 이유에서건 아내, 엄마가 집을 떠나면 가정은 비극이 시작된다. 남편들은 꿋꿋하고 자상하게 아이를 키우기보다 아내에 대한 배신감, 분노, 울분에 빠져 더욱 황폐해지고 아이들까지 괴롭힌다. 그들은 건강한 가장역할을 하지않고 폐인이 되기도 한다. 서울역 노숙자 상담소 관계자는 『기혼 노숙자들의 대부분은 아내가 가출한 상태』라고 한다.

그러나 역시 가장 고통을 겪는 것은 아이들이다. 믿고 사랑했던 엄마, 늘 돌봐주던 엄마가 어느날 갑자기 사라졌을 때 아이들이 받는 충격은 그 어떤 말로도 묘사가 불가능하다.

엄마의 가출로 남동생과 함께 고모집에 얹혀있는 여중 2년생 수민이는 사는게 고달파 『냉동되었다가 10년후쯤 깨어났으면 좋겠다』고 한다. 고모네 눈치도 보이며 부모 걱정도 되고 투정부리는 동생 달래랴. 열다섯 소녀의 얼굴에는 늘 그림자만 잔뜩 끼어있다.

『엄마가 아빠한테 많이 맞고 고생했으니까 엄마라도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요. 하지만 꼭 우릴 두고 가야했는지 섭섭해요. 이담에 엄마가 되면 난 절대로, 절대로 내 아이를 버리지 않을 거예요』

집나간 엄마들은 지금 어디 있을까. 어디에 있든 철없는 엄마들이 편안하게 기댈 수 있는 곳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그리고 그들은 그 어느곳에 있어도 아이들의 소리를 듣지않을 수 없다. 『엄마, 빨리와』

/유인경기자/